유익현 극복기

먹기 전 뽀뽀하고 웃고 사과하고

암사랑 2020. 2. 25. 09:53

먹기 전 뽀뽀하고 웃고 사과하고

 

저 유익현은 올해 육십대 중후반으로 전북 전주시 완산구 변두리 산 바로 밑 공기 좋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가족들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차에 가족력이 전혀 없는데도 B형 간염을 30대에 알고부터도 무지에서 온 방심으로 40대에 간경화를 진단 받고 병원을 전전하다가 54살에 간암 초기(2cm) 진단을 받고 색전술 수회, 알콜 주입 시술 수회, 받으며 2년여를 버텨왔지만 나 자신 즉 생활 습관은 전혀 바꾸려고 하지 않고 2년여 동안 병원치료에만 매달리다 보니 폐와 갈비뼈 전이 암(5cm)을 맞이하게 되어 방사선 치료 18회 받고 희망이 없다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쓰라린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은 사랑하는 우리 아들은 직장관계로 타지에서 생활하고 딸은 출가하고 나의 생명의 은인 사랑하는 내 아내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생기발랄한 30대 젊은 시절, 예비군 훈련장에서 헌혈을 자주했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다가 어느 날 검사 결과표를 받아보고 B형간염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염이 훗날 그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리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격렬한 운동과 등산을 즐겼고 운동이 끝나고는 동료들과 2차, 3차로 많은 술을 마시는 우를 범했습니다. 간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는 맥주 한 잔에도 속이 메스껍고 소화가 잘 안 되었습니다. 동네 내과에서 혈액 검사를 받아보니 활동성 만성간염이라고 했습니다. 대학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해봤지만 똑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완전히 끊고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는 한편, 몸에 좋다는 단방약이나 건강 식품들을 ‘카더라 통신’만 믿고 무작위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간이 더 혹사당한 건 아닌지 지금도 후회가 됩니다. 만성간염 진단 후 금주는 했지만, 격렬한 운동을 계속하고 마음의 안정도 찾지 못한 채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았는지 40대에 간경화 환자가 되었습니다.

 

정기 검사를 꾸준히 하면서도 간염을 앓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먹는 것으로 병을 고쳐보겠다는 무식한 생각을 버리지 못해 몸에 좋다는 단방약이나 건강 식품들을 계속 구해서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효과가 없는 듯하면 쌓아놨다가 버리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1년 초, 그러니까 제 나이 50대 초반에 간암 초기 진단을 받고 맙니다! 간경화와 암세포에 정복당해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지려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주치의가 절제 수술을 하면 괜찮다고 얘기해 수술을 결정했는데, 입원 전날까지도 무슨 배짱인지 퇴근해서 예나 다름없이 테니스 코트에 나가 동료들과 격렬하게 운동을 즐기고 다음날 무덤덤한 마음으로 입원을 했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입원해서 원활한 수술을 위해 이런저런 검사를 했는데 수술 하루 전날, 주치의로부터 수술 불가 통보를 받게 됩니다. 간수치 악화, 즉 간경화 말기로 혈액 응고가 잘 안 되어 개복과 동시에 다시 닫아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고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거였습니다.

 

한 시간가량 저와 가족, 주치의가 함께 ‘수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의논했습니다. 주치의에게 “만일 선생님이나 선생님 가족의 경우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주치의는 “안 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이에 저는 수술을 포기하고 차선의 치료를 택했습니다.

 

주치의는 색전술이란 치료를 권하더군요. 수술만 하면 깨끗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지만, 색전술만이라도 받으면 웬만큼 해결되리라 믿고 다시 희망을 가져봤습니다. 색전술을 하고 다음 날 퇴원, 하루 밤을 지내고 제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로 회사에 출근해서 또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한 달이 지나 정기 검사 결과가 나온 날, 저는 출근하고 제 아내가 대신 결과를 보러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애들이 몇 명이냐? 나이는 몇이냐” 등등 심상치 않은 질문을 하더니 암이 재발해 색전술을 다시 해야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고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기만 합니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서울 큰 병원에 가서 색전술도 하고 이식도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식 전문 병원에 입원해 색전술을 하고, 이식 가능성을 수소문했으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별 소득 없이 퇴원했습니다. “간암에는 약이 없다” “관리 잘해라”는 말만 듣고 퇴원하자니 정말 제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습니다.

 

퇴원 다음 날 출근해서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심각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입맛이 떨어져 끼니때마다 두세 숟가락 정도 먹으면 많이 먹었다 할 정도로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에 14킬로그램이 빠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얼굴은 해골 그 자체가 돼 보는 사람마다 걱정과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습니다.

 

내 나이 쉰 초반, 아직 젊고 할 일도 많은데 가족에게 짐만 되는 현실 앞에서 하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내는 제가 잠들면 숨을 잘 쉬고 있는지 제 코에 귀를 대어보는 것도 모자라 저를 한 번씩 흔들어 깨우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습니다. 그 당시 자기가 너무나 힘들었다고 훗날 웃으며 저에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저는 이유도 모른 채 “왜 깨우느냐?”며 인상을 쓰곤 했는데, 지금도 종종 그때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맘에 겸연쩍게 웃곤 합니다.

 

그렇게 힘든 한때를 이겨내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되는 듯했는데, 간암 진단 후 약 5~6개월이 지날 즈음 아토피 피부염 진단을 받게 됩니다. 가려움 때문에 밤마다 잠을 설치고 너무 괴로울 때는 차라리 제 생명을 거두어주었으면 하고 빌게 되더군요.

 

가려움증을 개선하려고 소문난 양·한의원을 전전했는데, 그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건강 검진에서 간암수치가 다시 높게(afp370) 나왔습니다. 곧바로 대학 병원을 방문해 혈액 검사와 CT 검사를 하니 간암이 재발되어 색전술을 또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뒤 검사에서는 암수치가 두 배로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엔 좀 더 적극적으로 간 이식을 알아보려고 서울 모 대학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했는데, 이번엔 폐와 갈비뼈까지 전이되었다는(5cm) 더 충격적인 통보를 받게 됩니다. 주치의는 폐와 갈비뼈로 전이된 암이 더 큰 문제라면서, 수술을 할 수는 있지만 수술을 해도 희망이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희망이 ‘0’이라는 현실 앞에 ‘그래도 수술을 해볼까?’ ‘어찌해야 좋을까?’ 침대에 누워 30~40분을 고민하다가 ‘그래, 수술은 포기하자!’ 맘먹고 벌떡 일어나 아내를 붙들고, “이 병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괴롭겠지만 더 도와달라”고 애원하며 펑펑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천사 같았던 아내도 나를 꼭 지켜주겠노라고, 용기를 주겠노라고…… 이 못난 저에게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수술 대신 결국 방사선 치료를 18회 마쳤습니다. 편안한 맘을 갖기 위해 30여 년 정들었던 직장도 정리하고, 내가 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식이요법을 찾아 병행 치료를 해보기로 맘먹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저에게 맞는 식이요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의 소개로 알게 된 식이요법을 병원 치료와 병행하면서 정말 죽을힘을 다해 치료에 임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식이요법을 지킨 덕인지 정기 검사 결과 꾸준히 상태가 호전되다가, 약 2년이 되어갈 즈음인 2005년 2월 주치의로부터 “이제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되니 혈액 검사만 하면서 지켜보자”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올 땐 정말 절망적이어서 심란했는데…… 유익현 님처럼 전이 상태에서 이렇게 좋아진 사람은 10만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입니다!”라며 저보다 더 기뻐하더군요. 정말 하늘에 붕 뜬 기분이었고, 저는 그간 고생한 아내를 붙들고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혈액 검사만 하면서 입원도 하지 않고 약도 한 톨 먹지 않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간암 수치도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요.

 

돌아보면, 치료의 지름길은 나 자신이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분노나 미움, 서운함이 있어도 헤아림과 배려로 용서하고, 맘을 비우고 모든 생활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은 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낭떠러지 앞에 도달해서야 정신을 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후회가 되는 부분은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이든 경중을 따지지 말고 바로 지금이 치료의 골든 타임이라는 생각으로 치료에 임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 긍정적 태도 또한 매우 중요하고요.

 

간경화나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이제 나는 죽었구나 생각하는 사람은 2~3개월을 못 넘기고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저는 간경화나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 조금 힘들 뿐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많이 웃고, 좋은 생각만 하고,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매일매일 노력하면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암, 특히 전이 암 환자가 되고부터 가장 힘든 점이 있다면 의사, 약사, 간호사, 주위의 모든 분, 심지어 가족까지도 저를 죽을 것이란 눈초리로 보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자면, 방사선 치료를 할 때 웃고 장난치며 천진난만한 어린애처럼 병원 생활을 하는 저를 보고 간호사가 좀 한심하고 안쓰러웠는지, “유익현 님은 그렇게 웃고 다닐 때가 아닌데요”라는, 걱정 아닌 걱정을 담아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자면 낫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음은 필수이고, 규칙적인 취침과 많이 웃는 즐거운 생활을 바탕으로 그간의 잘못된 생활 태도를 180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어떤 약이나 음식을 먹을 때 그것들을 입에 대고 뽀뽀를 세 번 하고 열 번 웃은 뒤, 약과 음식을 아픈 장기에 대고 문지르면서 사과하고 약을 먹습니다. “간아! 간아! 지금까지 너를 너무 혹사시켜서 미안하다! 앞으로는 최고로 편안하게 돌봐줄 테니 우리 건강하게 잘 지내보자꾸나” 하고 사과하고 난 뒤 꼭꼭 씹어서 침과 함께 삼킵니다. 100퍼센트가 아닌 200퍼센트 이상의 치료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늘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서도 박수치면서 큰소리로 한참을 웃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수시로 큰소리로 웃고,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막춤을 추고…… 무염죽을 먹을 때도 한 수저를 입에 넣고 150~200번을 씹는가 하면, 신나는 음악에 맞춰 밥상 가장자리를 두드리면서 어깨춤을 추며 즐겁게 먹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삶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직 오늘이 제일 중요하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려 했던 것도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의사로부터 완치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예전 생활로 돌아가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간경화나 암환자는 평생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소홀한 부분이 없는지 점검 또 점검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이렇게 지나온 저의 투병기를 적는 이유는, 투병 기간 동안 물심양면 저를 도와준 사랑하는 가족과 주위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과 함께 15년 전의 아픈 기억을 뒤로하고 지금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보고를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계시는 많은 환우님들이 절대로 희망을 잃지 말고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병을 이겨내는 데 저의 경험이 작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입니다. 환우님들, 치료할 때는 직장이나 가족, 돈 걱정 등 스트레스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고 머리를 비우고 마음과 몸을 최고로 편안한 상태로 유지하셔야 합니다. 치료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사실이 제가 경험하며 배운 크나큰 교훈이었음을 말씀드리며 투병기를 올립니다.

 

지금도 어려움에 힘들어 하는 전국에 많은 환우님들의 연락을 받고 제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경험들을 서로 공유하면서 저와 똑같은 시행착오를 적게 하기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간경화나 암환우님들과 가족들이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루하루 좋아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분들보다 제 건강유지에 더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 제가 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 전화번호, 제 블로그가 활짝 열려있으니 언제나 오셔서 더 많은 환우님들이 쓰라린 고통 속에서 해방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블로그 주소 : http://blog.daum.net/ikhyun7501

 

핸 드 폰 : 010-9877-7501

 

* 유익현 님은........... (소개글을 아래 예문 형식으로 써주세요)

 

예문) 홍길동 님은, 올해 마흔 살로 지리산자락에서 살고 있다. 삼십 중반에 처음 위암 진단을 받았고, 수술과 6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교사인 아내와 아들과 함께 시골에서 살면서 텃밭을 가꾸고, 가끔씩 들어오는 번역 일을 소일 삼아 지내고 있다. 동 터오는 하늘 바라보기를 좋아하고, 가족들과 하는 느릿한 산책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