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기 모음 /투병기 (펌글)

아품도 축복이다.

암사랑 2020. 9. 21. 12:21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12월 12일! 절대로 잊을 수 없
는 날이다.

대통령 선거로 한창 나라가 떠들썩하던 그 해
내가 느닷없이 암환자로 등록되고 수술을 받은 날이니까.

거기서부터 내 일상생활은 균열이 심해지고 심리적 갈등
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수술 받으면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꾸준한 관리는 내 몫이었다.
항암제를 맞아야 했고 방사선 치료도 받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다, 버텨내기 벅차다고 탄식하면서 아픔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마침 대학병원에서 주
최하는 암환자를 위한 사회복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과 만나 정보를 공유하면서 내가 짊어진 고통의 무게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더니 아니나 다를까 만나자마자
어떻게 잘 버텨냈는지 솔직하게 토로하는 말 한마디 한마
디가 내겐 그 누구의 말보다도 인상적으로 콕콕 박혔다.

15명은 1주에 두 번 만나 진지하게 강의를 들었다.
암을 극복해온 의지로 사회에 돌아가 정상인으로 살아가
려는 꿈도 야무져서 나이가 40대 초반부터 60대까지 각각이었음에도 숙연한 분위기였다.

난 그때 한창 방사선치료 중이어서 건강을 회복해 보이는 그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나는 언제나 저들처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나 그런 허무맹랑한 상념에 잠기곤 했다.
암 투병에 대한 여러 가지 실제적인 정보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면서 내 앞날에 켜졌던 적색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
는 듯했다.

지금은 그 절차들이 무사히 끝나 호르몬제를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
지금도 잠깐 잊고 살다가도 경종을 울리듯이 가슴과 어깨 부위가 야릇하게 먹먹해지곤 하는 육신의 통증을 절대로
반갑지 않지만 친구처럼 손님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의사선생님 말씀대로라면 평생 그 고통과 동반자가 되어 살아야 한다고 했다.
왼쪽 겨드랑이 임파선을 떼어냈기 때문에, 왼쪽 목 아래부분을 수술했기 때문에. 개수대 물을 버려야 할 때, 묵
직한 물건을 집어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한참을 걸으면서, 가방에 오카리나와 악보를 잔뜩 짊어지고 산으로 강
으로 쏘다니다가 문득 무거운 물건 들지 말라 했는데 ‘왼쪽 팔 사용금지’라는 말을 상기하면 우울해지곤 하였다.

다들 왼쪽이니까 얼마나 다행이냐고들 말한다.

그러나 왼손잡이에게 무슨 위안이 될 수 있으랴? 나도 모르게 왼손을 많이 쓰게 되니 말이다.
항상 건강하다는 자만심으로 살아왔다. 잡초처럼 끈질기기에 돌멩이일지라도 잘 삭이니 면역기능이 어쩌는지 관
심을 접고 나름 바쁘게 자신의 몸을 혹사하면서 지냈다.

새벽이면 눈을 번쩍 떠서 음악을 들으며 뉴스를 보고 음식을 만들고 총총히 직장 다녀와 쉴 때까지도 골똘히 뭔
가에 몰두하곤 하였다.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진정 필요하고 중요한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그저 세월의 끈에 질질 끌려 다녔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휴일에도 마찬가지로 늘 일거리를 만들어 설치고 다녔다.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녔다.

해변이든 산이든 계곡이든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대도시의골목을 걸을 때조차 항상 가난한 철학자인 체하였다.


가족력도 없는데 내가 암환자가 되다니 받아들이기 참 힘들었다.

좋아하던 음식과도 생명을 지속하고 재발을 막기위해 반드시 결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과자류든 햄버거든 튀김이든 잡식성으로 살아왔는데 산책을 하다보면 저 먼 발치서부터 갓 볶은 커피향이 코 주변을 간지럽힐 때, 그전에 즐기던 자장면, 피자, 닭튀김 냄새에 마음이 산란해지곤 하였다.

남들은 맘껏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면서 웃으며 사는데 나만 무리에서 튕겨 나와 외톨이가 돼버린 듯한 불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양심적으로 소신있게 살아왔음에도 이유 없이 세상으로부터 벌 받았다는 억울함에서 자유롭기가 힘들었다.
작년 12월 대학병원에서 조직검사 결과 암 판정을 받고 수술날짜를 잡고 병실에 입원하니 먼저 와있던 같은 방환우가 냉큼 찐 고구마를 내게 건넸다.

이제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식구’라고 하면서, 음식부터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 난 원래 즐기는 음식이 고구마는 아니었다.

그러나 차츰 입맛을 바꿔 그전 즐기던 음식을 멀리하려고 애쓴다.


병원에서 준 주의 사항을 좌우명으로 되새기며, 생활하면서 적어도 규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다짐한다.

늙어서 100세 이상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하루를 살아도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고 싶어서다.
인간이 고등동물인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축복 아닌 게 어디 있으랴?

불면증이 무슨 병이냐? 배부른 투정이지? 그렇게 가볍게 치부하고 반문할 수 있다.
누구나 크든 작든 통증을 느끼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비록 개별적이라서 남의 고통보다 내 손가락 조금 다친 아픔이 훨씬 절실한 건 어쩔 수 없는 본성이겠지만.

그래서 난 수술 전보다 의식주 등 여러 면에서 불편을 감수하고 종종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불면에 시달리기도 하지
만 명상으로 스트레칭으로 산책으로 극복하려고 마음을 돌린다.


천재지변으로 또는 인재나 교통사고로 인해 인간은 태어 날 때 못지않게 죽을 때를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섭리가 작용해서이겠지만.

그렇게 암환자가 되면서 난 더더욱 숙명론자가 되었다.

한편 이 세상의 어두운 면보다 밝은 면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고 받은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알게 모르게 신세를 진 사람들의 은혜에 감사하고 고마움을 나눠주는 일을 할 시간의 여유를 얻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내 주변을 잘 정리하여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며 떠날 수 있게 생명 연장의 배려를 해준 의학의 획기적인 발달에 갈채를 보낸다.

나도 큰 혜택을 받은 사람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조기 발견은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하니 말이다.

아직도 사망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긴 해도 예전에 비해 생존율이 높아진 게 사실이기에. 아니었으면 난 내가 암 덩어리를 품고 살면서도 몰랐을 테고 자신을 성찰할 시간도 없이 여러 가지 핑계거리만 한보따리 짊어지고 무의미하게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생각을 떠올리면 끔찍하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있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

인명재천(人命在天)’,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견디고, 성실하게 자기 몫을 다해야 할 무한 책임과 권리가 있다는점을 명심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옷깃을 여민다.

 

최용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