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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수많은 암환자들에게 제 사연을 공개합니다

암사랑 2021. 1. 27. 07:14

이 땅의 수많은 암환자들에게 제 사연을 공개합니다

  • 기자명 이소명 기자(맨발걷기시민운동본부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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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소명 맨발걷기시민운동본부 부회장
수술과 항암제 없이 유방암 극복한 비결(1)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27년이 흐른 지금, 그 때의 그 단호한 선택으로 저는 현재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유방암과 친구처럼 27년을 살아오고 있는 저의 특별한 이야기를 올립니다.

저의 별명은 ‘종합병원’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랬습니다. 늘 골골거렸고, 그런 딸 때문에 부모님께서도 걱정을 달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도 ‘종합병원’이었답니다. 그런 생활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활동하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감기는 늘 달고 살았습니다. 몸이 약하다보니 고단백 육류가 최고인 줄 알고 끼니 때마다 육식을 섭취했습니다.

 

식탁 위에는 장기腸器 별로 약 보따리가 그득했습니다. 한약에, 영양제도 자주 먹어대니 몸은 더 혹사 당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이곳저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보니 남편한테도, 아이들에게도 늘 미안한 아내였고 또 엄마였습니다.

“그렇게 힘든데 왜 병원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 같은 반문의 질문들을 종종 받을 때에 저는 “무서워서 검사해볼 생각을 차마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큰 병에 걸린 것으로 진단이 나오면 사형선고로 여기고 삶을 체념할까봐, 희망으로 버텨 지탱해온 생각마저 병들까봐, 절망에 빠지면 육신이 더 쇠약해질까봐 검사를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건강강좌는 저의 인생 지침을 돌려놓았습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계기가 됐기 때문이었죠. 그 강좌는 ‘채식으로 건강을 지키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강의를 들으면서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 삶의 이정표를 마련했다고 할까요?

 

이 때부터 저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끼니 때마다 육류를 달고 살던 식생활을 바꾸고 캔 음료 대신, 과일을 먹었습니다. 늘 식사를 준비하기가 귀찮다보니 외식과 인스턴트를 즐겼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 대신 채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구절을 한번 믿어보기로 한 거죠.

창세기에 보면 므두셀라라는 사람이 969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이후 육식이 허락된 시기부터 급속히 인간의 수명이 짧아졌고, 식품보관을 위한 화학물질 첨가제로 성인병이 급증되는 현상을 보니 저 또한 인공적인 것을 절제하며 살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곧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주일 단위로 몸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매사에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변화였습니다. 늘 누워지내며 이곳저곳 아프다는 얘기뿐이었던 저였기에 그야말로 유토피아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 이번 기회에 꼭 건강을 되찾아보리라” 하고 결심도 서더군요. 그래서 정말 더 열심히 실천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몸은 하루하루 좋아져 갔고, 더 이상 골골하는 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채식을 하고 일체의 화학적인 것을 거부한 결과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1년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늘 피곤해 하시고 약을 달고 살았던 시누이가 난소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수술을 하고 항암제 주사를 맞으시면서 온 집안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이 일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모든 가족들은, 병은 초기에 발견해야 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단체로 병원 검진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들 성화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도 가기 싫던 병원, 분명히 상태가 안 좋은 쪽으로 나올 게 뻔했기에 저는 많이 망서렸습니다. 그런데 1년 6개월 전보다 더 이상 예전의 골골하던 제가 아니었기에 애써 자위했습니다. 겁낼 것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가장 먼저 유방암센터로 가서 검사를 했습니다. 그것은 예전부터 늘 왼쪽 유방에 묵직한 통증이 있었서였습니다. 그동안 채식을 하면서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졌기 때문에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검사 결과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습니다. 촬영한 필름에는 유방에 좁쌀, 큰 것은 콩만 한 점들이 자잘하게 많이 퍼져 있었습니다.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의 일동제약 사거리에 있는 암전문병원이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꼭 받아보셔요.”

의사는 수차례 연락을 해서 점검을 했습니다. 그러나 염려해준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고마웠지만 저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만약 1년 6개월 전 제가 유방암 검사를 받았다면 분명 4기로 진단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 무럽 제 몸은 이러다가 얼마나 버틸까? 그 정도였거든요.

그 시절에 비해 진단 무렵, 채식으로 몸을 정화된 후에는 몸이 아주 가뿐했기에 난 암세포를 집안에 들어온 바퀴벌레 없애듯 없앨 것이다! 하고 확신에 차있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이 없을 무렵이라 집전화 코드를 빼버렸습니다. 그 대신 과감히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것은 암세포에 대해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는, 상식적으로 아주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병원 검사 결과 유방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지만 저는 병원 치료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습니다. 당시 난소암을 앓고 있는 시누이가 항암치료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시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시고, 반 초죽음이 되셔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시는 과정을 방문 가서 자주 뵈었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잘 모를 겁니다.

 

저는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항암치료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게 저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냥 차라리 앓다가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의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1년 6개월 정도의 채식 식생활을 통해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진 저를 보면, 지난, 10년, 20년 동안 잘못된 식생활로 내 몸 속에서 서서히 자라온 암세포도 깨끗한 식생활로 조금씩 차차 분명히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이 때부터 저는 자연과 가까운 생활로 돌입했고 채식주의자로 살았습니다. 육류는 입에 대지 않았고. 현미잡곡밥을 기본 주식으로 먹었고 제철에 나는 채소와 과일 위주로 철저한 채식을 실천했습니다. 단백질은 콩 종류로 대체했고 땅콩, 밤, 호두 등 견과류 위주로 섭취했고. 당근, 상추, 민들레, 냉이, 쑥 등 각종 채소는 즙을 짜 먹거나 생 채소로 즐겨 먹은 편이였습니다. 특히 야생초를 즐겨 먹었고 외출 시에는 직접 만든 잡곡떡을 가지고 다닐 만큼 저의 채식 사랑은 절정에 이를 그 무렵, (진수성찬이 차려진) 결혼식에 갈 때도 먹을 것을 따로 챙겨 갔습니다. 가급적 외식으로 만날 수 있는 약속은 자제했습니다.

 

인스턴트가 몸에 해로운 이유는 화학물질로 식품을 보존하는 유효기간을 늘리거나 맛을 가미하고자 인공조미료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에, 또는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조차도 샴푸까지도 화학물질이 함유되어 있어 사용을 최소화했습니다.

내 몸에 병이 생긴 것은 피 전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를 맑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인체는 피 자루이기에 제 몸 안에 흐르는 피 성분을, 맑은 피로 교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정말 열심히 실천했답니다.

그렇게 18년 동안 병원은 가보지도 않고, 가볼 이유도 없었을 무렵, 제 나이 58세에 손자가 태어났기에 손자 곁을 자주 접촉해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모가 건강해야 된다는 딸의 간곡한 간청에 저도 이 참에, 제 건강상태는 어떨까 궁금해 서울삼성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결과는, (저는 깨끗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아무런 암세포 한 점의 흔적도 전혀 없다는 건강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물론, 몸둥이 전체가 완벽하지는 않았기에 방광쪽에 이상이 있으니 엑스레이를 한 번 더 촬영하자는 것을, 과감히 손사래치고 병원을 나와 지금껏 제 몸을 잘 다스려가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결과는,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전혀 없고 하루하루 활기차게 살았기에 암환자라는 걱정은 다 잊어버리고 지냈는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채식을 실천한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육식은 결코 인류의 먹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이 긴 인간은 채식을 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고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런 탓에 저의 채식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채식의 대중화를 위해 아낌없는 열정을 쏟아 붓고 있었고, 실제로 저는 ‘채식과 건강’ 신문의 주필을 맡아 채식 열풍을 주도하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자연치유로 낫는 분들을 찾아다니며 실천 잘하고 있는 분들의 생활습관들을 신문과 잡지를 통해 홍보하였고 제발 병들기 전에 미리 예방을 잘 하시라고, 한마디로 나발을 불고 다닌 셈이었습니다. 즉, 이 때까지는 채식에 퐁당 빠져 먹거리에만 치중을 둔 셈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무렵 자연치유로 낫는 분들을 찾아 전국을 다녔습니다. 병원에서도 포기하신 이 분들은 신발, 양말을 다 벗고 맨발로 산을 걸어다녔습니다. 산에서 신선한 산소를 접하느랴 아예 산속, 침낭속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식생활도 제가 그동안 먹어왔던 방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보았습니다. 중증 환자들도 몰라보게 달라지는 모습을 접한 후 저는 전혀 문외했던 맨발로 산을 걷는 운동의 아주 중대한 자연치유 방법의 행운을 그 때부터 거머쥐었습니다. 이 무렵 '맨발걷기 즐거움’이란 박동창 맨발걷기시민운동본부의 회장님 저서가 한창 인기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도시에 살고 있기에 산에서 잘 수 없는 상황이라 집에서 춥게 지내되, 옷을 따뜻하게 입고 지내며 신선한 공기를 잠자는 시간에도 최대한 들이마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일관하니 나이가 점점 많아지면 누구나 체력도 후퇴하는데 저는 오히려 40대 때보다 지금이 훨씬 기력이 많음을 오늘의 저의 치유사례를 읽으시는 분께 자신감 있게 말씀을 드립니다. 물론, 키에 비해 체중은 적게 나가기에 외관상으로는 연약해 보여도 타고난 건강체질은 아니었기에 겉으로는, 건강인 모습은 아니랍니다.

 

암 진단을 받으면,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암세포 앞에서 당당히 맞서 온 저는 지금도 암환자라고 생각하고 절제하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때 또 생활방법이 무너지면 엄습할지 모르는 오염된 세상에서 노력하는 길이 살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감기가 걸려도 우선순위를 맨발로 지력을 충분히 받는 쪽을 선택합니다. 특히 높은 산을 선호하다보니 오늘도 7시간 정도 북한산 험한 계곡을 맨발로 걸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몸에서 생동감으로 꽉찬 것 같아 이 자리를 빌어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6년 말부터 박동창 회장님의 긍휼지심 그 숭고한 정신을 돕고 싶어 저도 맨발걷기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규칙적인 맨발걷기 운동을 하고

▷적당한 일광욕을 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며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생활을 하며

▷깨끗한 물 마시기

▷맑은 공기 심호흡

▷천연의 맛 채식식사

이러한 인체 공식을 제시한 조물주의 방법을 노력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분명 암세포는 우리 몸에서 떠나고 싶어할 것입니다.<계속>

사진=맨발걷기시민운동본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