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타/정겨운 사진들

조선의 도검

암사랑 2018. 4. 25. 15:29

조선의 도검

□ 이순신장군의 도검

삼척서천산하동색 (三尺誓天山河動色), 일휘소탕혈염산하 (一揮掃蕩血染山河)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는 각각 "세척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도 빛이 변한다" , "크게 한번 휩쓰니 피로써 산과 강을 물들인다."는 뜻이다. 왼쪽 사진은 칼에 새겨진 명문으로 三尺誓天山河動色라는 붉은 색 글자가 선명하다.

□ 곽재우 장군의 도검

□ 무예도보통지의 도검

□ 사명대사의 하사검(불교의 만자표시가 된 조선검)

□ 사인검과 삼인검

위 사진 속의 칼들은 육군박물관에 소장된 인검들이다. 제일 위의 칼은 사인검(四寅劒), 중간과 아래쪽은 삼인검(三寅劒)이다. 비교적 정교하게 제작된 명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전용 칼의 예리한 맛은 없지만 의장용 칼답게 중후하고 장중한 분위기가 넘치고 있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위의 사진과 같은 형태의 인검(寅劒)은 송나라시대의 의장용 검을 계승한 양식으로 생각되며, 우리나라에서도 빠르면 고려 중기부터 이런 양식의 칼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간 조선시대의 각종 검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양식으로 생각된다.

□ 사인검

사인검은 조선조 중기에 왕들이 장식용 또는 호신용으로 지녔던 검이었다. 여기서 사인(四寅)이란 12지간 중에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 즉 네 마리의 호랑이를 뜻한다. 인해와 인달, 인날, 인시에 열처리한 것으로 60년만에 한 자루를 제작하는 진귀한 검인 것이다. 
사인검의 표면에는 사인검을 설명하는 한자 27자가 순금으로 새겨져 있다. 이글은 사인검의 용맹스러움과, 사인검이 갖고 있는 영험한 신비를 알려주고 있다.
칼집은 어피(철갑상어 껍질)로 되어 있고, 손잡이는 동으로 되어 있으며, 순슴으로 사인금이라 상감되어 있다. 길이 94cm, 중량 1.4kg

□ 조선의 태조어검

 

□ 패월도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映嬪 李氏)가 소유했던 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덕궁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을 거쳐, 현재는 육군박물관에서 소장 중입니다. 일부 자료에서는 영빈 이씨가 평소에 차던 칼로 소개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시대에 궁중여성이 이런 대형 군도를 평소에 차고 있었을지는 의문스럽게 보고있죠. 칼날이 달처럼 휘어져서 패월도(佩月刀)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이름에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운검(雲劒)과 유사하며, 넓은 의미에서의 환도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날 길이는 90.5 cm이고, 손잡이 길이는 24.5 cm. 무게는 860g.

□ 별운검

조선세법은 본시 양날의 검을 이용한 검법인데 이런 외날을 이용한다는것은.. 조금.. 복원품이라고 합니다. 일본도 같기도 하다는...

□ 운검

이 운검은 현재 단 1자루만 전해져 내려오는 유일한 운검 실물 유물이다. 칼날의 길이는 73.1cm, 손잡이의 길이는 20cm이다. 87.2cm라는 길이는 직선으로 측정한 길이이므로 손잡이와 칼날 길이를 합친 값보다는 다소 짧다. 칼집과 손잡이는 사어피(沙魚皮)로 장식되어 있다. 푸른 색 수술 사이로 칼 소장자의 호패가 보인다. 추정의 근거는 알 수 없으나 육군박물관에서는 대략 17세기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무게는 690g이다.

□ 이삼장군의 언월도

이삼 장군은(1677∼1735)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숙종 31년(1705)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경종 때에는 포도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영조 원년(1725) 어영대장을 지냈다. 영조 3년 훈련대장이 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어, 함은군에 봉해졌다. 상월면 석종리에 무덤과 영당이 있고, 주곡리에 있는 고택에 이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언월도에 용광사우두성(龍光射牛頭星)이라는 명문이 새겨 있다.

□ 환두대도


환두대도(環頭大刀)란 칼 손잡이 끝에 둥근 형태의 머리를 가진 큰칼이다. 손잡이와 칼날이 조립되지 않고 하나로 된 일체형으로 칼은 곧은 직도로써 칼날은 거의 직선을 이루면서 끝 부분으로 갈수록 밋밋하게 좁아 들었다. 칼날과 손잡이 사이에 손을 보호하는 칼 방패인 고동(古銅)이 없다. 검집은 나무에 칠을 하거나 동물의 가죽을 감싸서 만들었고. 손잡이 부분은 나무로 덧대고 가죽으로 감싸거나, 금실과 은실을 교대로 감아 장식한 것도 있다. 손잡이 부분의 앞과 환두(環頭)에 금은으로 상감처리해서 무늬를 새기고, 환두 안쪽에 용이나 봉의 머리를 만들어 넣기도 한다.


▶ 환두의 장식에 따라 
- 소환두대도(素環頭大刀) : 검 손잡이 끝의 환두 안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형태의 대도 
- 삼엽환두대도(三葉環頭大刀) : 환두에 삼엽무늬가 장식된 대도 
- 삼루환두대도(삼루환두대도) : 둥근고리 3개가 연접된 환두를 가진 대도 
- 용봉문환두대도(龍鳳紋環頭大刀) : 용이나 봉의 머리장식이 있는 환두를 가진 대도

로 분류하며 신분에 따라 시대에 따라 장식 형태가 구분된다. 

중국의 고서인 "한화고구려유(翰花高句麗柔)를 보면 "한반도 사람들은 도려(刀礪)를 차고 이로써 등위를 나타내었고, 금우(金羽)로써 귀천을 밝혔다"고 하였다. 이는 검을 항상 패용하고, 검으로 신분을 나타낼 수 있을 정도로 검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신분이 맨 아래인 소환두에서 삼엽환두, 그리고 최상급이 용봉환두로 여겨진다. 

▶ 역사적으로 보면 

BC 400경에 청동검과 함께 철제검이 나타나고 BC 200년을 전후해서 환두대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BC100년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환두대도가 삼국시대에 가장 기본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환두대도는 백제와 신라,가야에 까지 전하여져서 드디어 삼국시대는 환두대도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백제는 국가기관에 도부(刀部)를두어 특별히 칼을 제조하였으며, 신라에서 사용되었던 환두대도는 삼엽환두대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우주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시 교외에 7세기 아프로시압 도성의 벽화에 새깃털을 꽂은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신라 사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신라의 국제사회와 널리 교류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세기 5C경의 삼실총 2실에 허리에 환두대도를 찬 무사상이 그려져 있다. 

5세기대의 왕릉에서 왕이 패용하는 대도는 삼루환두대도이고, 6세기 왕이 패용하는 것은 용봉문환두대도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직도에서 칼날이 휘어진 곡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환두대도는 BC200년부터 고려시대까지 약 1000년 동안 사용하던 우리의 전통검이었다.AD10세기 신라가 고려에 흡수되면서 신라인들 또한 일본에 건너가 병법과 도검 제작 기술이 전수되어 일본 도검의 원류를 이루었다. 헤이안, 무로마치 시대에 무사계급 성장과 함께 발전되어 오늘날의 일본 특유의 일본도가 만들어졌다. 중세 이후 칼을 만드는 기술은 도리어 일본이 앞서게 되었으며 한국과 중국이 모두 좋은 칼을 일본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다. 

▶ 환두대도의 출토지역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경남 김해군 주촌면 양동리 가야고분(서기 2세기 경)에서 발굴된 환두대도가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청동기 유물과 철기유물이 뒤섞인 이 고분에서 발견된 길이가 120cm에 이르는 환두대도는 지금까지 동검으로 상징되던 피장자의 신분적 상징물이 환두대도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길이 120cm는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발굴된 환두대도 중 가장 큰 것이라 한다.


경남 창녕 교동에서 출토된 가야시대의 환두대도는 전장이 74.0cm로 나타나고 있으며 경남 합천 옥전에서 출토된 다른 검의 규격은 전장 89.0cm로 조금 더 크다. 또한 신라지역이었던경북 경주 안강에서 출토된 전장 85cm의 환두대도도 나타나며 또 백제지역의 천안 화성리에서 출토된 전장이 80.0cm의 각기 다른 규격의 다양한 칼이 발견되고 있다.


청주 신봉동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환두대도는 금은상감환두대도(金銀象嵌環頭大刀)이다. 손잡이 부분에는 2개의 고리가 있으며 손잡이 끝에 원형의 고리가 달려있는데, 3개의 고리는 모두 상감 처리되었다. 황남대총 남분에는 삼루환두대도 6점과 삼엽환두대도 3점이 부장 되었는데 그 중 피장자가 패용한 삼루환두대도는 환두와손잡이 부분은 금동, 칼집장식은 금과 금동관으로 만들었고 앞뒷면으로 각 3개씩의 자도(子刀)를 화려하게 부착하였다.


특히 산월리 2호분과 3호분에서 출토된 3점의 환두대도는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에서 처음 출토된 것으로, 이들 고분에 묻힌 주인공의 신분 및 산월리 유적의 위상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로 판단된다. 천안 화성리유적의 은상감당초문환두대도(銀象嵌唐草文環頭大刀)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의 것이며 , 용원리 유적, 남원 월산리, 가야의 고령 지산동, 양동리 고분, 청원 도계동, 신라 경주 호우총, 천마총(5~6세기경의 신라시대), 함안 도항리, 경주시 인왕동(금동장 봉황환두대도

보물제621호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다.